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롤루스 대제 (문단 편집) == 평가와 역사적 귀속 == 통칭 '''Pater Europae([[유럽]]의 [[아버지]])'''.[* [[프랑크 왕국]]의 강역 때문에 '''[[유럽]]'''이 아니라 '''[[서유럽]]'''이라는 태클이 나올 수 있지만, 일단 통칭은 '''Pater Europae(유럽의 아버지)'''다.] [[프랑크 왕국]]을 [[동로마 제국]]과 비등한 하나의 제국으로 키워냈으며, [[서로마]] [[라벤나 함락|멸망]] 후 한동안 역사의 주변부로 전락했던 [[서유럽]]을 다시 서서히 역사의 중심 무대로 올라오게 하는 토대를 놓은 걸출한 [[군주]]이다. 당대 프랑크 왕국은 문화나 경제력 등의 [[소프트파워]]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주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인구나 군사력 등의 하드파워에 있어서는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군사적 확장으로 서방 [[가톨릭]] 세계는 독자적인 튼튼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고, 폐허나 다름없던 서방의 지적 풍토에 있어서도 문화적 부흥을 일으킨 점이 높이 평가받는다. 따라서 "[[중흥|서유럽이 카롤루스의 치세에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하였다]]."고 하는 게 고전적인 역사관이다. 이후 역사학자들은 카롤루스의 통치기를 '''[[르네상스(동음이의어)#s-2|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도 불렀다. 다만 최근에는 앙리 피렌을 필두로 하여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카롤루스에 의한 부활에 대한 비중을 줄이고, 로마 세계와 지중해 문명의 계승자로서 [[메로베우스 왕조]]를 재조명하며 [[카롤루스 왕조]]와 메로베우스 왕조의 차이점을 들어 둘을 구분짓는 시각도 대두되고 있다.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의 주요 국가들 대부분이 그에게서 기원했음을 고려하면[* 비록 [[동유럽]] 및 [[영국]], [[스페인]] 등 이 말에 해당되지 않는 지역은 상당히 많긴 하지만 이들 지역 일부 역시 간접적으로 카롤루스의 영향을 받았다. [[영국 왕실]]은 [[노르만 왕조]]를 통해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스페인 왕실도 [[보르본 왕조]]를 통해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Pater Europae(유럽의 아버지)'''라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다보니 유럽의 여러 왕국들은 카롤루스를 [[대제]](大帝)라 불렀으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에서 찾았다. [[프랑스]]에서는 [[클로비스 1세]]와 함께 오랫동안 [[국부]]와도 같은 지위에 있었고 [[중세]] 이래 생성된, 중세 [[그리스도교]] - [[기사도]] 문학 구전에 의해 거의 신화적인 전설들로 포장되어 신격화되기도 했다.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라면 당연한 말이고 카롤루스 왕조 직계가 끊어지자 이를 모계 계승으로 이은 [[카페 왕조]] 및 카페 왕조의 부계 분가인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부르봉 왕조|오를레앙 왕조]] 등은 전부 카롤루스 대제와 프랑크 왕국 역사를 자국 및 왕조의 주요한 선조 역사로써 매우 중시하였다. 하지만 [[근대]] 후기 [[내셔널리즘]]이 확산되면서 [[프랑스인]]들은 프랑스 땅에서 훨씬 오래된 그 자신들의 기원 중 하나인 고대 [[갈리아족]]에 대한 재인식을 하며 이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으며, 또한 게르만적 정체성이 강력한 [[독일인]] 계열 세력 국가들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의 첨예한 대립이 두드러지면서 프랑스인이라는 민족을 구성하는 3대 요소인 [[게르만족|게르만]], [[라틴]], [[켈트]] 정체성 중에 게르만적인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고 결국 게르만적 정체성을 격하시키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때에 카롤루스에 대한 프랑스 내의 폄하도 두드러지게 발생하였다. 그러나 [[클로비스 1세]]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격하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는데 이는 클로비스 1세와 그의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이 비록 게르만계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독일인 민족 형성에는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은 집단이었으며 반면 카롤루스의 경우에는 독일인 민족 형성에 영향을 끼친 카롤루스 왕조의 핵심적인 인물이고 메로베우스 왕조와는 달리 카롤루스 왕조는 수도 및 행정 관리 체계부터가 독일 방면에 더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수도(행정구역)|수도]]는 현재까지도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프랑스)|파리]]였고 핵심적인 행정 관리 체제도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프랑스 땅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카롤루스 왕조의 상징적인 수도는 카롤루스 대제로 인해 오늘날의 독일에 속한 [[아헨]]이 되었고 카롤루스 왕조는 독일 방면 개발에도 열심이었다.] 오늘날 프랑스는 라틴, 켈트적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프랑스]]의 실질적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메로베우스 왕조의 프랑크 왕국의 지배층이 게르만계 민족인 [[프랑크족]]이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중세 [[프랑스 왕국]]은 게르만적 정체성도 분명히 내포한 체계였다. 애초에 켈트에 대한 내셔널리즘적 재인식은 무려 19세기에 들어서서 일어난 일이지 그 이전의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게르만계인 프랑크인이나, 하다못해 라틴계인 [[로마]][* 켈트계인 갈리아인과 라틴계인 로마인의 [[혼혈]]인 갈로-로만.]에서 찾았지 그보다 이전의 고대 켈트족에서 찾지는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천 년 가까이 프랑스를 지배했던 [[카페 왕조]] 혈통이 왕위에서 단절되고 이후 이탈리아계(정확히는 코르시카계) 왕조인 [[보나파르트 가문|보나파르트 왕조]]가 잠시나마 프랑스를 통치하기까지 하면서 탄생한 [[프랑스 공화국]]과 [[프랑스 제국]] 시기부터 급격히 확산된 내셔널리즘 의식 속에서 '''"너는 게르만, 우리는 라틴과 켈트"''' 등으로 정체성을 딱딱 구분지으려는[* 실제로는 그렇게 구분되어질 수 없음에도 그리 되었다. 요컨대 독일인들도 순수한 게르만계 고대 민족들의 통합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서슬라브계 민족들이었던 [[체코인|보헤미아인]], [[포메라니아]]인, 소수의 [[폴란드인]]들도 섞여서 형성된 민족이다. 거기에 고대 남독일 지역을 장악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갔던 켈트계 민족인 보이족도 따지자면 오늘날 독일인의 혈통적 기원 중 하나이므로 독일인은 무조건 게르만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식으로 치부될 수 없었으며 게르만, 켈트, 라틴의 융합체인 프랑스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내셔널리즘의 광풍이 세계를 휩쓸던 때였고 그런 식으로 민족 개념을 단순화, 국가 단위로 일원화하려는 과격하고 비역사적인 행태가 세계 각지에서 만연했다.] 시도가 일어났고 이 때문에 프랑스인이라는 개념 내에서 게르만으로써의 정체성 색채가 상당기간 부정되어버린 것이며 그 때문에 카롤루스도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역사적 위인 중 한 명임에도 강한 폄하를 당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근대 프랑스의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 직접 "프랑스에 샤를마뉴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다."라고 말하는 등, 카롤루스의 프랑스에서의 존재 자체가 그 시기에 부정된 것은 아니다. 한편 독일 방면에서는 물론 게르만계로서 독일 지역을 정복하고 [[게르마니아]] 토착 민족들인 [[색슨]]인[* [[브리튼]] 제도로 건너간 앵글인, 색슨인을 의미하는 게 아닌, 독일 지역에 잔류했던 [[작센]]인을 의미한다.], 튀링겐인, 프리스인, 알레마니인 등등을 정복 전쟁으로 모조리 정복한 뒤, 그 전부를 [[가톨릭]]으로 개종시켜 하나의 집단 체제 안에 넣어 [[독일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태동시키게 한 카롤루스를 당연히 자국과 자국민들의 위인 중 하나로 여기긴 했지만 바로 그 카롤루스의 가장 주요한 '''침략 대상'''이 다름이 아니라 오늘날의 독일 땅과 그 땅의 토착 게르만계 민족들이었다는 점으로 인해 카롤루스에 대한 숭상이 중세 프랑스처럼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즉, 카롤루스와 프랑크 왕국 사람들은 이런 [[게르마니아]]의 토착 [[게르만 신화]]를 믿는 게르만계 민족들을 '''게르만 친척 내지 동족이 아니라, 죽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든지 택일해야 할 사악하고 어리석은 사교도들'''로 간주하고 있었고, 실제로 밑의 카롤루스의 일대기를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게르마니아 지역에 정복 전쟁을 감행하여 무수히 많은 게르만계 토착 민족들을 학살하고 억압적인 강제 개종 정책을 시행하여 독일 전역을 평정한 자로서 게르만계 민족들 중 하나인 프랑크인의 지도자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독일인의 선조 게르만계 민족들을 도륙한 외세 정복자'''로서의 이미지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당연히 근현대 독일인들로서는 무턱대고 카롤루스를 숭앙하기에는 다소 꺼림칙한 면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카롤루스가 그렇게 독일 지역을 정복하고 가톨릭을 전파하고 게르마니아의 온갖 게르만계 민족들을 통합시켜 차츰 하나의 독일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케 하는 원인이 되었으므로 카롤루스는 독일인의 위인으로도 분명히 평가를 받지만 그럼에도 그 독일인의 선조들을 학살했다는 카롤루스의 역사적 특징 때문에 대단한 위인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 또한 독일에서 내셔널리즘 의식이 형성되며 독일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관념을 재고하던 19세기부터의 일이고 그 이전의 전근대 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카롤루스는 [[그리스도인]] 전체의 [[영웅]]이자 독일을 중심지로 두고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적 기원자로써 독일에서도 크게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근간이 가톨릭인 만큼 사교도 학살과 정복전쟁을 탓하기는 뭐했기 때문이다(중세 후기의 튜튼 기사단만 해도 폴란드에게 깨질 때까지 계속 학살극을 벌였다)말하자면 카롤루스는 프랑스와 독일 양쪽에서 발생한 각자의 근대 내셔널리즘과 자국민들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여러가지 재고 방식들로 인하여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와 독일 쌍방 모두에게 꽤나 역사적인 푸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격하고도 비역사적이며 비학문적인 형태의 내셔널리즘이 차츰 사그라들고 민족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좀 더 학문적이고 다변화된 형태로 재구축된 20세기 중엽부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써 조상의 일원인 프랑크인의 게르만적 정체성을 다시 재고찰하고 인정하게 되었으며 카롤루스 역시 중요한 역사적인 위인으로써 대우하게 되었다. 물론 개개인의 역사관이나 학문적 수준에 따라서 카롤루스에 대한 인식 역시 꽤 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현대 프랑스에서 카롤루스는 매우 중요하고도 위대한 역사적 위인으로 대우받고 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카롤루스를 자국의 위인으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롤루스가 프랑스의 위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으며 양쪽 모두 카롤루스를 공통의 자국 위인으로 여기게 되었다. 애초에 중세 시대에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로 프랑크가 분열할 때에 이미 '''프랑크 제국'''에 대한 계승 의식을 '''프랑크'''로써의 정통성 계승은 카롤링거 왕가 직계가 가장 오랜 기간 잔존했던 서프랑크(=[[프랑스]])[* [[루이 5세]]가 마지막 카롤루스 프랑스 왕이었으며 그 이후로는 카롤루스의 모계 후손인 [[위그 카페]]가 프랑스 왕위를 차지하였다.]가 이었다고 보는 것이 거의 자타공인이었으며 반대로 '''제국'''으로써의 정통성 계승은 동프랑크(=[[독일]])를 중심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건립하고 카롤루스의 모계 후손임을 주장한 [[오토 1세|오토 대제]]에 의해 독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역시 거의 자타공인이었다. 즉, 카롤루스의 유산은 프랑스와 독일 양쪽 모두에게 이어져 내려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그럼에도 앞서 언급한 카롤루스의 독일 방면에 대한 침략자로서의 역사적 행적 때문에 현대 독일에서는 여전히 카롤루스를 그렇게 크게 대접하지는 않고 있다. 카롤루스가 제국의 수도로 삼고 자신의 고향처럼 여긴 [[아헨]] 지역을 제외한 타 독일 지역에서의 카롤루스에 대한 인식은 꽤나 조촐한 축으로 현대 프랑스가 카롤루스를 자국의 위인으로 크게 홍보하는 것과는 꽤나 대비되는 모습이라 하겠다. 실제로도 독일인들은 카롤루스가 자국 위인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중 어느 쪽 위인에 가깝느냐라고 묻는다면 프랑스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이 일반적이기도 하다. 이같은 독일인들의 카롤루스에 대한 시선은 현대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여론 조사를 통해 선정한 [[틀:프랑스 2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위대한 프랑스인 100인]]과 [[틀:ZDF 선정 위대한 독일인|위대한 독일인 100인]] 항목에서 카롤루스가 프랑스인 위인 100인에는 선정되었지만 독일인 위인 100인에는 선정되지 못한 것으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카롤루스가 정복한 북부 [[이탈리아]]와 이후 역사에서 프랑크 제국 체제에 오랜기간 속해있던 북부 이탈리아의 카롤루스에 대한 인식은 프랑스나 독일에 비해서 훨씬 부정적인 편이다. 현대 이탈리아인들의 경우에는 애초에 중세 초 [[프랑크족]] 지배층과 [[이탈리아인]], [[랑고바르드 족|랑고바르드]] 피지배층의 혼혈이 딱히 광범위하게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중세 초 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프랑크인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조상의 일원이라기보다는 그저 '''[[이탈리아 반도]]를 스쳐지나간 한때의 [[정복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훨씬 강하며, 또한 현대 이탈리아인들에게 있어서 프랑크 제국은 딱히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게는 [[고대 로마]]에 대한 동경의 정서가 압도적이며 하다못해 로마가 아니더라도 [[랑고바르드 왕국]]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지 프랑크에서는 거의 정체성을 찾지 않는다. 즉, 딱히 프랑크나 카롤루스 마그누스를 자국의 대단한 위인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예 카롤루스를 자국 위인이 아니라 이탈리아를 침략한 '''[[외국인]] 침략자'''로 보는 정서가 더 강할 정도이다. 물론 [[중프랑크 왕국]]이 오늘날의 이탈리아의 전신격 국가들 중 하나인 만큼 북부 이탈리아인들에게 프랑크족 혈통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생물학적으로만 그럴 뿐 정신적 의미에서 북부 이탈리아의 프랑크족은 현대 북부 이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도록 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 애초에 중프랑크 왕국 자체가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 비해 후대에 물려준 유산이 적고 국가 자체도 빨리 멸망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나마 프랑스 및 독일어권(스위스/오스트리아)과의 접경지대 정도가 카롤루스 대제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인데, 이족은 해당 국가 주민들과 혼혈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까지 읽는다면 "왜 카롤루스와 프랑크인들이 같은 게르만 민족을 공격했느냐?"라는, 오랫동안 단일한 민족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사실 한국사의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 그리고 [[6.25 전쟁]]을 생각하면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민족끼리도 모종의 이유로 서로 적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켈트]], [[게르만]], [[라틴]]과 같은 것은 하나의 민족 개념이 아니라 '''제어 사용자 민족들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학계에서는 줄여서 제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고대 켈트는 [[아일랜드]]에서부터 남부 [[독일]], [[이베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이탈리아]] 북부, [[발칸 반도]] 북부에서 무려 [[아나톨리아]]에 [[이집트]]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켈트 제어 사용자 민족들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의 민족인 것이 아니다. 게르만 역시 마찬가지로 [[프랑크]], [[색슨]], 앵글로, 프리스, 튀링겐, 알레마니, [[랑고바르드]] 등등의 중세 게르만계 민족들은 같은 '''게르만 제어를 사용하는 각기 다른 민족들'''인 것이지 하나의 단일한 민족체가 아니었으며 당연히 서로 간의 뚜렷한 동족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한국사]]에서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까지 [[예맥]] 계통의 민족들이 따로 국가를 이루면서 살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로 간 문화나 언어의 유사성으로 동질성을 느껴도 단일한 동족이라는 의식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프랑크가 게르만계 민족이었다는 것이 그들이 다른 게르만 민족을 위해야 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다. 또한 현대 독일인이 게르만계 민족들 전체를 대변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게르만계 민족들 중 하나인 도이치인일 뿐인 것이다. 근현대의 사례이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겉으로는 게르만 민족주의를 외쳤으나 실상은 게르만족의 도살자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많은 게르만족(네덜란드인, 노르웨이인 등 비독일계 게르만족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독일인까지)을 학살한 바 있다. 또한 당대 게르만계 민족들은 [[포르투갈]]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포르투갈인]]의 기원적 조상이 된 [[수에비족]], 북부 이탈리아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이탈리아인]] 정체성의 조상 일원 중 하나가 된 [[랑고바르드족]], 프랑스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프랑스인]] 정체성의 조상 일원 중 하나가 된 [[프랑크인]], 히스파니아 방면으로 이주 정착하여 오늘날 [[스페인인]]의 기원적 조상 중 하나가 된 비시고트([[서고트]])인 등 구 [[서로마]] 제국령으로 이주 정착한 게르만계 민족들과, 반대로 오늘날의 [[독일]] 땅인 [[게르마니아]] 지역에 잔존한 [[색슨]]인, 알레마니인, 튀링겐인 등 잔존 게르만계 민족들로 구분지을 수 있었는데 이주 정착한 게르만계 민족들은 서로마의 유산을 이어받아 전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지만 반면 독일 방면에 잔존하여 살아간 게르만계 민족들은 전원이 인신공양을 하는 전통 [[샤머니즘]]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기독교가 가장 뿌리깊게 혐오하고 증오해온 것이 인신공양과 강신술'''이므로, 카롤루스와 프랑크인들은 저 게르마니아의 잔존 게르만계 민족들을 그저 '''개종시키지 못하면 죽여 없애야 할 사교도'''로 볼 수밖에 없었다. 어쨌건 오늘날 카롤루스는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지에서 각자 자국의 위인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비록 20세기에 서로 간에 카롤루스가 누가 그들의 위인인지를 두고 논쟁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그들 모두의 공통 위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어쨌건 그의 존재와 행적이 [[중부유럽]] 민족들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저 나라들의 역사적 행보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카롤루스 개인의 정체성을 말하자면 아까도 언급했듯이 그는 "나는 [[게르만인]]"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며 당연히 당시 [[프랑크인]]들이 전부 그러했다. 그들은 그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자 프랑크인"으로 생각하였을 뿐이다.[* 비슷한 경우로 [[청나라]]의 [[만주족]] 또한 스스로를 "몽골과 중원의 지배자이자 만주족"으로 생각하였을 뿐 [[퉁구스]]인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주족의 입장에서 [[나나이족]], [[우데게족]] 등 다른 퉁구스계 민족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족일 뿐이었다.] 카롤루스와 그의 [[프랑크족]]의 혈통 기원, 문화적 정체성으로 볼 때에는 오늘날의 네덜란드 지역에서 살았던 게르만계 민족인 [[프리시|프리시족]]과 친척 내지 거의 동류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이 프랑크족이 프랑스 지역에 정착한 뒤에 다시 네덜란드를 침략하여 프리시족의 나라인 [[프리지아(유럽)|프리지아]]를 멸망시키고 프리시족을 복속시켰으며 그 프리시족과 프랑크족의 융합이 차츰 [[네덜란드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카롤루스는 네덜란드의 역사적 위인으로도 대우받고 있다. [[벨기에]]의 경우에는 그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정체성을 모두 함유하며 탄생한 국가로서 마찬가지로 카롤루스를 자국 위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유럽에서 카롤루스는 '''서중부 유럽 전체의 위인'''이지만 동시에 "굳이 어느 한쪽의 위인인 것이냐?"를 묻는다면 아무래도 [[프랑스]] 쪽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상태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